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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지6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 복자 윤봉문 요셉성지 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 - [백 한 번째] 복자 윤봉문 요셉의 가족이 거제도에 정착한 것은 1868년경이다. 병인박해 중에 윤사우 스타니슬라오가 양산 ‘대처’를 거쳐 이곳 진목성에 와 전교 활동을 폄으로써 활발하게 포교 활동이 이루어진다. 윤봉문은 윤사우의 둘째 아들로 거제의 사도로서 형경문과 함께 교회 회장직을 맡아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쓰는 한편 자신의 수계에도 열심이었다. 1888년 2월7일 옥포에서 체포된 윤봉문은 거제 부사 박병용의 호출을 받고 거제 관아로 끌려가 태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포졸들은 배교시키려고 심한 문초와 고문은 가했지만 순교자는 믿음으로 견디다 진주로 옮겨져 교살(絞殺)당해 순교하였다. 순교자의 가족으로는 부인 진(診) 펠리치타스와 아들 학송 루카(당시 7세).. 2018. 1. 12.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 신앙고백비 신앙고백비 - [아흔 네 번째] 신앙고백비는 1866년 병인박해 전의 신자인 김삼록 도미니코(1843~1935년)가 자기의 신앙 고백에 관한 내용을 비석에 새겨 그의 집 뒷산 바위 위에 세운 것이다. 신앙고백비가 서 있는 상주군은 일찍부터 복음이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 김해 김씨 집안의 4형제 중 둘째였던 김삼록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박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1886년 한불 수호 조약 이후에 공식적인 박해가 끝나고 자유가 허용될 무렵인 1894~1900년 초에 그와 그 집안의 문중들이 살고 있던 석단산 아래의 현재 청리면 삼괴 2리 안골짝의 쌍바위 중 오른쪽 큰 바위에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신앙고백비를 건립하였다. 크기는 높이 127cm, 폭 39cm, .. 2017. 12. 2.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 한티 순교성지 한티 순교성지 - [여든 네 번째] 한티 순교성지는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이다. 을해박해와 정해박해를 전후하여 박해를 피한 교우들이 팔공산 중턱으로 숨어들어 1850년 말경에 한티는 큰 교우촌을 이루게 된다. 병인박해가 진행 중이던 1868년 봄, 한티에 들이닥친 포졸들은 배교하지 않는 많은 교우들을 배교하지 않는 많은 교우들을 그 자리에서 처형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박해 소식을 듣고 인근에 살던 교우들이 한티에 들어왔을 때에는 이미 마을은 불타 없어지고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이 산야 곳곳에서 썩어 가고 있었다. 시신의 훼손이 너무 심하여 옮길 수가 없었기에 순교한 그 자리에 시신을 안장하였다. 지금까지 확인된 한티 순교자들의 묘는 모두 37기로 박해 당시의 교우촌과 그 주위에 넓게 흩어져 있.. 2017. 7. 22.
한국천주교 성지순례 - 연풍성지 연풍성지 - [일흔 번째] 연풍 순교성지는 초기 교회부터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던 뿌리 깊은 교우촌으로 연풍의 산간 지역은 신앙 선조들이 경상도로 피신하는 길목이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와 칼레 강 니콜라오 신부도 연풍을 거쳐 경상도와 충청도를 넘나들면서 교우촌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특히 최 신부는 1849년부터 12년간 새재를 넘나들며 이 지역에 신앙의 꽃을 피우다가 선종하여 새재의 연봉인 배론 신학당 뒤산에 묻혔다. 그 결과 연풍은 각처의 신앙을 이어 주는 교차로가 되었으며, 1866년의 병인박해 때는 수많은 교우들이 이곳에서 체포되어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된다. 연풍 병방골(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은 황석두 루카(1813-1866년) 성인의 고향이고, 연풍 성지는 성인의 묘소를 모시고 있는 곳.. 2017. 4. 29.
한국천주교 성지순례 -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 [쉰두 번째]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다.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오늘도 그를 본받아 이 땅의 참된 목자가 되려는 신학도들의 모든 삶에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효시는 18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선교사들은 정하상을 비롯한 소년들에게 국내에서 신학 교육을 시키는 한편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중 김대건과 최양업만이 사제품을 받고 귀국해 활동하다가 순교했던 것이다. 그 후 1855년 배론에 성요셉 신학당이 세워져 신학 교육을 시작했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폐쇄되었고 1885년 강원도 여주군 강천면 범골(부엉골)에서 현 가톨릭 신학대학의 직접적인 .. 2016. 8. 21.
한국천주교 성지순례 - 광희문 광희문 [쉰한 번째] 광희문은 서울 성곽의 사소문(홍화문, 광희문, 소덕문, 창의문으로 사대문 사이에 세웠던 문을 말함.)중에 동남 방향에 있는 성문으로 장충단에서 한강 사이에 남소문(南小門)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水口門)을 일컬어 광희문이라고 불렀다. 본래 수구문은 서소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체를 성 밖으로 운반해 내던 곳으로 송장 또는 시체의 문이라는 뜻에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렀다.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이 도성 안으로 끌려 들어왔고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치명의 길을 가야 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이곳에 내다 버려졌으니 실로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이었다. 살아서 이 문.. 2016.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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